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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세계

By joana, July 1, 2010 2:05 pm

눈 앞의 트레이싱지에 세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은 정교하고, 트레이싱지는 한 치의 구김도 없다. 투명한 종이가 일렁거린다. 메슥거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계가 방 천장과, 꺼진 램프의 모습을 하고 내게 가라앉았다.

과음했다.

엄마는 고양이의 피부병을 치료하러 외출했다. 엄마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나는 머리로 베개를 밀면서, 블랙아웃과 잠의 틈새, 투레질하는 두통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먼 곳의 으르렁거림같았다. 현관과 침실 사이에 넓은 폭포가 있어서, 다녀오겠노라는 말과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깨뜨렸다. 파편을 휩쓸어갔다. 나는 물에 젖은 듯 엉망진창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선배가 술자리에 나타날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을텐데.

뱃속이 한덩어리로 튕겨올랐다. "으."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려다 말았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감긴 이불을 개켜 침대로 던졌다. 코로 신 냄새를 맡았다. 현기증, 상체가 저절로 구부러졌다. 입천장을 거센 숨이 비비고 지나갔다. 몇 초, 몇 번의 들숨과 몇 번의 날숨을 셌다. 침을 삼키고 몸을 폈다. 얻어맞은 것처럼 갈증이 왔다.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걸었다. 고양이가 어지러뜨린 모래 알갱이가 발바닥에 파고들었다. 엄마는 고양이 화장실을 내 방 문 옆에 놓고 화장실 치우는 일을 내 몫으로 맡겼다. 화장실을 흘깃 보자 회색 모래로 뭉쳐진 검은 똥이 두 개 있었다.

집안의 모든 불이 꺼진 채였다. 오후 두 시에서 네 시쯤인 것 같다. 커튼과,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놓인 거실에 햇빛이 덮여 있다. 집에 엄마는 없다. 고양이도 없다. 엄마는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기 때문이다.

식탁을 덮은 보자기 아래로 반찬통 몇 개의 윤곽이 보였다. 멸치조림과 콩자반이 있다. 일부러 보자기를 들추지 않아도 안다. 어제 같은 보자기를 벗기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문득 지금이 바로 어제 오후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쯤인건 아닌지, 이틀 전 엄마가 계모임으로 외출했을 때 주스를 가지러 나왔던 그 주방은 아닌지, 오늘은 오늘인지, 여기는 여기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선배의 연락을 피한 뒤로 사나흘 정도 그런 상태였다. 역시 개강파티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냉장고로 주스를 가지러 갔다. 냉장실 손잡이에 중지와 약지를 걸어 당겼다. 냉장실 문을 당겼다. 냉장실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였다. 나는 허공에 멈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당겼다. 냉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옆구리까지 끌어다 놓은 팔꿈치를 의식했다.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손을 의식했다. 손은 텅 비었다. 그것은 그냥 냉장고다. 그런데 그 문은 열릴 리가 없을 것 같다. 나는 팔을 늘어뜨렸다. 고개를 늘여 냉장고를 관찰한다.

다시 손잡이를 붙들고 잡아당겼다. 천천히 움직였다. 문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손잡이를 놓친 오른손을 본다. 문을 놓쳤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아니 게다가 아직 문은 내 오른손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냉장실에서 배어나오는 희끄무레한 냉기가 무릎에 기어올라오는 것도 같다. 그러나 냉장고 문은 틀림없이 꾹 닫힌 채다. 나는 보이지 않는 냉장고 문을 놓아 버린다. 다리를 감싸던 싸늘함이 끊겼다. 멀리서 자석을 감싼 고무가 부딪히는 터억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냉장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있다.

나는 몸을 돌렸다. 식탁 위의 보자기가 걷혀 있고, 거기에 멸치조림과 콩자반이 있다. 식탁의 의자가 끌려나와 있다. 식탁보는 뒤틀려 있다. 짧은 기억들이 섞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냉장실의 두꺼운 문이 LED 빛을 삼키며 닫히고 있었다. 희끗한 광선이 찰싹 가늘어지고 그늘이 서로 달라붙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메스꺼워졌다. 위장이 빙그르르 돌면서 목구멍까지 신 것을 밀어올린다. 뺨을 그러쥐어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까지 큰 걸음으로 갔다. 문틀에 어깨를 부딪혀서 휘청이다가 다시 발가락을 찧었다. 날카롭게 아팠다. 변기 앞에 몸을 구부리고 무너지듯 앉았다. 내장이 찰삭 쪼그렸다. 재차 억지로 잡아뜯기는 감각이 몰아닥쳤다. 헛구역질을 했다. 눈물이 맺혔다. 눈가에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아 난 어제 화장조차 지우지 않고 잠들었다. 마스카라가 번졌을 것이다. 세면대를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거울을 봤다. 수증기가 끼어 희다. 거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밑단에 물방울이 맺힌다. 또옥 하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세면대는 바싹 말라 있다. 거울에서 다시 물방울이 맺히고 떨어지고 흔적도 없이,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거울에서 방울져 흘러내린 물자욱 너머로, 완벽한 화장과 머리를 갖춘 내가 왼눈을 깜박였다.

신 침을 입술에 머금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찬 물이 필요했다. 수도꼭지를 붙잡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풀어내려 했지만 손이 헛돌았다. 손떨림이 너무 심하다. 정수리로 거울을 찧으며, 다시 수도꼭지를 돌렸다. 머리에 닿은 유리가 차갑다. 손이 헛돌았다. 수도꼭지를 꽉 붙잡고 오른쪽으로 거듭 돌렸다. 손 안에서 그것은 고무패킹의 뻐근한 반발감을 내며 돌아갔다. 내 눈으로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거울은 흰 증기로 꽉 차 있었다. 거울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뒷걸음질쳐 화장실을 나왔다. 문의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혔다. 서두르면서도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고 생각했지만, 슬리퍼는 세면대 배관 아래쪽에 뒤집혀 있고 나는 맨발이었다.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발을 닦을 틈도 없이 내 방 문 앞에 주저앉았다. 내가 나올 때 방 문을 닫았던가? 고양이 화장실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쨍한 햇빛이 거실에 괴물처럼 큰 아가리를 그리고, 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오싹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침을 발랐다. 혀 끝의 감촉이 까슬했다. 갈증이 목구멍 깊숙이까지 처넣어진 것 같았다. 그것이 굳어 거친 표면을 이룬 것 같았다. 혀에 침을 머금고 다시 아랫입술을 매만졌지만 여전했다.

뒤를 돌아보니 세면대에 물이 쏟아진다. 내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이해한 순간,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물소리가 귀로 쏘아져 들어왔다.

어제 억지로 삼켰던 술이 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제 창수와 동오에게 팔 하나씩을 잡히고 끌려나가던 선배가 나에게 저주를 걸겠다고 소리쳤다. 선배의 말은 그런 식이었다. 허황하고, 꿈같고, 그래서 피식 웃음이 나게 했다. 어제도 그랬어야 했다. "저주가 뭐냐, 저주가."라는 친구들의 수다에 끼어 선배를 안주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대신 나는 오싹하였다. 술기운을 물리치느라 어깨를 털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선배의 협박을 믿어버렸다. 그래서 그의 저주는 성공했다. 술자리에서 물러나 집으로 오고 침대에 잠기면서도, 저주의 형태는 상상 못했으면서도, 어떻게든 그가 나를 두려운 재앙으로 몰아넣으리라고 믿었다. 선배는 제법 근사한 성공을 거두었다. 눈 앞의 세계가 내게서 도망치고, 손으로는 가장 단단한 것조차 쥘 수가 없다. 귓전에서 유령의 걸음 소리가 메아리로만 들리는 듯하고, 심지어 나도 한 마리 유령이 된 것 같다.

지난 시간도, 남은 시간도 알 수가 없다. 바닥이 발에 감겨서, 차갑고 축축한 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식은땀이 난다. 나는 당장 주스 한 잔조차 마실 수 없고, 수도꼭지도 비틀어 열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살지 않는 것조차 가능할지 모르겠다.

밧줄의 매듭도, 날붙이도 내 손에서 미끄러져나갈 것이다. 돌바닥도 내 머리통을 받아 으스러뜨리지 않고 물러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세계가 주의깊게 비켜나가는 오답과 같다. 세계는 인간이 가장 무관심한 대상에게 그러듯이 나를 살려놓고 있다. 선배가 그렇게 했다. 선배의 저주가 세계에 연결된 나를 신중하게 도려냈다. 녹아 사라지지 못하고, 마구 휘저은 물 속의 재처럼 혼란스러운 의식이, 여전히 나이긴 할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동물병원에 간 엄마가 돌아와 내 어깨를 흔들고 꿈에서 끄집어낼 것이다. 고양이가 이불 위로 뛰어올라 옆구리를 비빌 것이다. 응답이 없는 아파트의 침실과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 따위는 기지개 한 번에 바스러질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기도한다. 새삼스럽게 치밀어오르는 구역증을 억눌렀다. 시야 전체가 죽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희뿌옇게 일그러져서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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