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금발머리

image_short 2008/03/30 03:24


2004년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리면 어떨까, 생각하다 그대로 끄적임.
어쩐지 허무해져서 알아볼 만큼만 남기고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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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먼 나라이다

text 2008/03/30 00:16
백 걸음 바깥에 나라가 하나 있었다.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머리채를 가진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사람이 짐승과 어울려 살았다. 큰 비가 내렸다. 사람과 짐승의 눈과 귀가 멀었다. 짐승은 서로 부딪히다가 이를 드러내고 물어뜯으며 곧 모두 죽었다. 사람은 허리를 숙이고 겁내어 걸었다. 그러다 땅을 더듬으니, 썩은 고기를 옮기느라 바쁜 개미 떼가 있었다. 사람은 그것을 본받았다. 입을 맞추며 인사하여 평화로움을 선언하고, 두 손을 더듬이삼아 천 가지 말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길게 살았다.
오랜 후에 큰 바람이 불었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병이 돌았다. 병이 입술을 타고 땅과 하늘을 뛰어다니며 사람을 잠재웠다. 잠든 사람은 숲을 한바퀴 돌아온 바람에 흐드러져서 날아갔다. 모든 사람이 잠들었다. 모든 사람이 먼지가 되었다. 공주도 눕고 곧 숨을 넘겼다. 바람은 다시 숲으로 쉬러 갔다.
사실 한 명은 남았다. 우연히 왼 눈을 보존했으되 입술이 없어 쫓겨난 문둥이였다. 문둥이는 숲 가장자리의 거적을 헤치고 나와, 먼지 쌓인 흙을 요밀히 밟고 잠든 사람이 있는 땅까지 갔다. 문둥이는 먼지 쌓인 거울과 녹슨 고기칼을 구했다. 옷맵시를 고치고, 제 혀를 베어서 아래웃니를 덮었다. 석회같은 빛깔의 머리채를 늘어뜨린 공주가 곱게 누운 향소의 단이었다. 문둥이는 머리와 어깨와 달뜬 심장을 돋워서 인사를 했다. 감히 공주의 발치에 누웠다. 잠이 들었다. 그래서 남았던 한 명도 목숨을 놓고, 마침내 모두 평화로워졌다.
자, 이제 백 걸음 바깥에는 아무런 나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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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척 이야기

text 2008/03/08 22:04
눈 사이가 유별나게 먼 것을 빼면 유별날 것 없는 보통 소년이었다. 저 생긴 것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으나, 미간척은 태연했다. 그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왕의 목을 베고자 했다. 똑같이 눈 사이가 멀었던 네 아비가 억울히 죽었다, 왕의 짓이다, 네가 아비의 복수를 하여라 하는 어미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소하고 재미있는 일에 관심 가질 틈 없이 내처 자라버린 미간척으로서도 억울할 일이겠으나, 젊음을 홀로 치러낸 어미는 독기로 눈이 멀었다.

그래서 미간척은 열 다섯 살에 투명한 검을 등에 지고 길을 떠났다. 그 검이야말로 아버지가 죽음을 각오하고 두드려 낸 물건이었다. 어미는 삯바느질로 모은 노자를 쥐어 주고 미리 목숨을 끊었다. 몇 벌 없는 옷과 식량을 챙겨 비끄러매고,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뒤로 하였다. 길이 거칠고 좁았으나 그는 젊어서 너울너울 걸어갔다. 이슬 젖은 잠도 잘 잤고, 마른 떡도 잘 먹었다.

몇 밤째인가 자고 깨어나 이마의 이슬을 터는데, 험한 인상의 선비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비는 미간척에게 어디로 가느냐 묻고, 등의 검집을 눈여겨 보았다. 혹시 왕을 죽이러 가느냐, 내가 눈 사이가 먼 아이의 소문을 들었더라 하고, 미간척이 어색하게 부정하자 허허 웃었다. 선비는 큰 걸음으로 미간척을 따르더니, 그를 돕겠다고 제안했다.

왕 앞에 나서자 선비는 공손히 절하고 큰 솥에 물을 채워 달라 하였다. 솥을 꺼내자 불을 활활 피우고 물을 끓였다. 선비와 미간척은 검을 들고 춤을 추었다. 선비의 춤이 대단하여 사람들은 넋을 잃고 보았다. 미간척은 좀 모자란 솜씨로 선비를 따라 덩실대었는데, 선비가 솥의 모서리를 따라 돌며 미간척의 머리를 잘라 솥에 빠뜨렸다. 왕과 신하가 웅성거리는 동안 선비가 하릴없이 춤을 추고, 잘 삶긴 미간척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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